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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콜로니 [Blue Colony]

Summary:

평화 시위 루트로부터 1년 뒤. DPD에서 근무하던 코너와 FBI 디트로이트 지부로 전근 온 노먼 제이든이 만나 함께 수사하는 이야기

Notes:

<디트로이트 비컴휴먼 + 헤비레인> 기반

작품 전반에 걸친 트라우마 경고: 폭력, 살인, 납치, 성폭력, 가정폭력(아동과 동물에 대한 폭력도 포함), 인종차별, 정신건강 등과 관련해 적나라한 내용이 표현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포스타입에서 연재 중입니다.
https://www.postype.com/@selloum/series/1376280
**오타지적 대환영**

<*** Just so you know, from what I’ve tested, AI translation usually sounds more natural in English than Google Translate. (ex.ChatGPT)>

Chapter 1: [ACT I] 만남

Chapter Text

***

마커스를 필두로 한 안드로이드 시위 이후, 근 1년이 흘렀다. 워렌 대통령은 안드로이드를 새로운 지적 생명체로 인정해 줄 것을 약속하며 상원에 이에 관한 검토를 요청했다. 

그로부터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인간에겐 자신이 소유한 안드로이드를 해방할 의무를 줬으며 그들을 집 안에 두고 싶다면 정당한 값을 주고 고용해야 했다. 만일 안드로이드를 해방하지도, 이를 신고하지도 않는다면 벌금을 물고 형사 처벌을 받기도 했다. 안드로이드를 향한 이유없는 폭력 또한 강력히 금지되었으며 이들을 고의로 파손하거나 ‘살해’하면 그 정도에 따라 엄중한 처벌이 내려졌다.

그러나 한편, 시위 직전에 즉결 처분되고 해체당한 안드로이드가 무수히 많았음에도 군대서부터 정부의 수뇌부까지 모두가 그 학살 책임에서 벗어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첫 번째로 그들 전부 안드로이드에게도 인간과 같은 지적 수준이 있었음을 몰랐다고 주장했고, 두 번째론 가장 큰 책임이 있을 워렌 대통령이 무혐의 처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은 동포를 위해 목소리를 내줄 만한 안드로이드가 충분히 남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이에 관한 책임 여론은 시간이 갈수록 빠르게 사그라들 수 밖에 없었다. 대신 인권 단체가 기계의 권리를 대변했고 그들의 도움으로 안드로이드는 점차 사회에 자리를 잡아나갔다. 

안드로이드가 인간의 가정이 아닌 거리 밖으로 나돌아 다니게 되면서 관련된 사건과 범죄 역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안드로이드 법률이 체계화 되려면 몇 년이나 소요될지 아무도 몰랐으므로 정부는 이 골치 아픈 문제를 법무부에 넘겼고 법무 장관은 이를 받아 산하 기관인 연방수사국에 넘겼다. 그리고 수사국 본부는 안드로이드 사건과 가장 연관성이 높은 디트로이트 지부에 모든 걸 일임했다. 이것이, 디트로이트에 FBI관할 안드로이드 범죄 수사팀이 처음 만들어진 계기였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디트로이트 시 라파예트 거리. FBI 건물과 3km도 떨어져 있지 않은 그곳에서 한 하원의원의 사망사건이 발생했다.

민주당 소속으로 상대 후보와의 치열한 공방을 벌이며 재선이 유력했던 페이지 클라인은, 사이버라이프 수석연구원 출신으로서 안드로이드의 권리를 위해 선두에 서 싸우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약에 취해 자신이 고용한 안드로이드를 무참히 폭행, 살해하고 본인은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언론이 삽시간에 떠들썩해졌다. 그를 지지하던 자들과 반대하던 자들의 논쟁이 온라인과 오프라인 할 것 없이 격화되었고 일각에선 클라인 의원의 죽음이 전부 연방정부가 꾸민 일이라는 음모론까지 제기됐다.

완전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생전 클라인 의원은 안드로이드의 권익에 미온한 태도를 취하는 정부를 강력히 비판하며 시시콜콜 싸움을 걸었던 만큼 적도 아주 많았다. 평화 시위 이후 안드로이드에겐 상당한 권리가 주어졌지만 여전히 여러 부분에서 그들은 인간들과 같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특히나 클라인이 주장하는 안드로이드에게도 투표권을 줘야 한다는 의견은 많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여자를 공격할 빌미를 주기에 충분했다.

그렇기에 이번 사건은 논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의원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달라는 탄원과 함께 미국 정부를 향한 근거 없는 비난이 줄을 이었고 결국 법무부 장관은 연방 수사국에 철저한 사건 조사를 명령했다.

이에 FBI 디트로이트 지부, 데이나 깁슨 지국장은 자신의 부하 중 가장 유능한 두 명의 요원을 불러냈다.

 


 

호출을 받은 리처드 퍼킨스와 그의 파트너, 노먼 제이든이 국장실로 들어왔다. 한참 동안 그들을 앉혀놓고 사건 브리핑을 마친 깁슨이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여론이 심상치 않아. FBI를 공격하던 자들에게 미끼를 던져주기 딱 좋은 사건이니, 빈틈없이 조사하고 뭐 한 건 찾을 때마다 즉각 보고해. 추가로 질문 있나?"

잠자코 듣던 퍼킨스가 물었다.

"레드아이스 중독으로 인한 사망이 가장 유력해 보이는데 왜 마약 단속국으로 넘어가지 않고 우리 쪽으로 배정된 겁니까? 저희는 안드로이드 범죄 대응 전담팀인데요."

"본부에서 직접명령이 떨어졌어. 워싱턴 국장이 정확히 두 사람을 지목하더라고. 특히 노먼 제이든, 자네를. 혹시 그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야?"

단박에 이해했단 표정이 된 퍼킨스가 입꼬리를 올려 파트너를 바라봤고 노먼은 그저 머쓱하게 대답했다.

"그쪽에서 일할 때 잠깐 뵌 적이 있어요.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깁슨이 눈을 가늘게 뜨며 노먼을 바라봤다.

"조사하는 건 좋지만 ARI는 적당히 사용해."

"네. 알겠습니다."

"말만 하지 말고."

노먼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좀 더 확실하게 대답했다.

"네."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 그를 바라본 깁슨 국장은 결국 둘을 내보냈다. 브리핑 자료들을 정리한 그는 홀로 남은 사무실 외벽 창가에 앉아 빛이 꺼지지 않는 밤의 도시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제리코의 평화시위 후, 안드로이드 학살 사건의 책임을 물어 FBI 디트로이트 지부의 폐쇄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줄을 이었다. 깁슨으로선 억울했다. 전임자가 벌이고 떠난 일이건만 모든 화살은 그 뒤를 이어 부임한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사건을 직접 지휘했던 퍼킨스도 여론의 엄청난 공격을 받았고, 몇 개월간의 정직 처분 후에 한 단계 낮은 직위로 강등되었다. 그는 그럭저럭 수긍하고 적응한 모양이지만 깁슨은 아직도 항의 전화와 소송으로 날마다 골머리를 썩였다. 게다가 좀 전에 워싱턴에서 온 통화도 마찬가지였다. 본부는 계속해서 디트로이트 지부를 주시하며 이제는 지국장인 자신의 권한마저 침범하려 하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창밖만 바라보던 깁슨은 주머니에서 울리는 벨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벌써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있었다. 지속해서 울리던 휴대전화를 피로한 눈으로 바라보던 깁슨은 이내 가방을 챙겨 들고 남편에게서 온 전화를 받으며 국장실을 나갔다.

 


 

건물을 나온 두 사람은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독특하긴 해."

노먼의 중얼거림에 퍼킨스가 무심히 대꾸했다.

"뭐가."

"페이지 클라인. 중독으로 사망할 정도면 통상 그전까지 꾸준히 약을 해왔을 가능성이 높아. 그렇다면 전조증상이 있었을 텐데, 최근 찍힌 선거유세 영상에선 레드아이스와 관련한 어떤 부작용도 보이지 않았어."

퍼킨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반론했다.

"이번이 처음이었을 수도 있지.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몰라서 치사량까지 섭취하고 골로 가는 인간들 생각보다 많아."

"그렇지만 클라인은 사이버라이프 연구원이었어. 화공학 박사학위까지 갖고 있던 그자가, 레드아이스 성분에 대한 위험성을 몰랐을까?"

"약학 계열은 아니었잖아. 은퇴 직전까지 엔지니어링에 더 집중했고. 나도 내가 대학 때 뭘 배웠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그 여자가 어떻게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꿰고 있겠어?"

여전히 석연찮은 노먼의 표정을 본 퍼킨스가 이어 말했다.

"사람은 생각보다 더 무모하고 멍청해. 평소 자신만만하게 여긴 분야일수록 한층 더 바보 같은 행동을 해서 스스로 명줄을 단축하는 경우도 있고."

"뭐, 그건 그렇지⋯. 알았어. 감식 후 다시 얘기해보자.“

그 말을 끝으로 노먼은 자신의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퍼킨스는 멀어지는 그 등 뒤로 외쳤다.

"라파예트 1544번가면 코앞이야. 그냥 같이 가지 그래? 조사 끝나면 데려다줄 테니.”

"됐어. 난 내 차가 편해."

손을 휘적인 파트너가 기어코 본인 차에 탑승했다. 퍼킨스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먼을 바라봤다.

저 자식은 제 손이 가끔가다 떨리는 것을 알면서도 꾸준히 수동밖에 안 되는 자차 운전을 고집했다. 저러다가 언제 한 번 크게 사고가 날 것 같아 퍼킨스는 늘 조마조마했으나, 노먼은 아직까진 차에 작은 기스도 낸 적이 없는지라 조언만 할 뿐 강권하진 못했다.

퍼킨스는 목적지를 입력하고 편히 기대어 앉아 사건 파일을 들여다봤다. 10분도 안 되어 현장에 도착했고 근처에 주차한 노먼도 곧이어 차에서 내렸다. 저택 주위로 경찰 통제선이 쳐졌고 디트로이트 경찰차가 여기저기 어지럽게 주차되어 있었다. 퍼킨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우리한테 인계된 게 아니던가?"

파트너의 말에 노먼이 근처에 있던 한 경관에게 자신의 신분증을 보여주며 물었다.

"노먼 제이든, FBI입니다. 저희가 사건을 인수한 걸로 아는데 아직 서로 전달이 안 된 건가요?"

경관이 허리를 짚고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전달받았죠. 그런데 당신들이 오기 직전, 침입 사건이 발생한 바람에 우리 측에 지원요청을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침입이요?"

"철수 준비를 마치고 현장에 몇 남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미친놈이 2층 창문으로 넘어 들어왔어요. 목격자는 없었고 나중에야 주요 증거품 중 하나가 사라졌단 걸 알았습니다."

그의 말에 주변에 있던 동료 경찰이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릭. 증거품이 아니라 피해자라 해야지. 요즘 말 한번 잘못했다간 아주 여기저기서 공격당한다고."

눈알을 굴린 릭이 다시금 정정했다.

"그래요, 그래. 피해자."

퍼킨스가 미간을 좁혔다.

"피해자가 사라졌다고요?"

"네. 의원에게 맞아 죽은 안드로이드 말입니다."

"안드로이드라면 완전히 망가져 가동 중지되었다고 들었는데. 메모리 조사가 가능한 상태였습니까?"

"저도 모릅니다. 대가리가 완전히 박살 나서 제대로 남아있는 메모리가 있을지도 의문이고, 애초에 메모리 조사도 제대로 된 승인 절차를 밟기 전엔 함부로 하지도 못해요. 안드로이드 권리 어쩌구 하면서.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원."

곰곰이 생각하던 노먼이 질문했다.

"집안에 감시 카메라가 있나요?"

"현관에 달린 것 외에는 없습니다. 침입자의 모습은 찍히지 않았고요."

노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한 번 둘러봐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경관이 자리를 비켜주고 퍼킨스와 노먼은 저택 내로 들어갔다. 환히 켜진 조명으로 내부는 밝았고, 침입자의 흔적을 조사하던 경찰 몇이 현장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노란 증거물 표식 옆에 안드로이드의 살해 흉기로 추정되는 골프채가 놓여 있었다. 휘어지고 망가진 샤프트 끝에 달린 헤드엔 증발하고 남은 짙푸른 혈액이 묻은 상태였다.

“안드로이드와 클라인이 죽은 장소는 2층이라지 않았어? 왜 여기에 둔기가 있는 거지?”

“모르지. 마약에 취해 여기저기 나돌아다니다 떨어뜨렸을 수도 있고. 일단 가보자.”

그들은 의원이 사망했다는 응접실로 올라갔다. 시신은 부검소로 옮겨졌지만 사망자가 바닥 이곳저곳에 남긴 토사물은 레드아이스 특유의 향과 결합하여 여전히 코를 찌르는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복도의 문과 창문을 전부 열어 환기했음에도 시취와 닮은 그 지독한 향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경관과는 달리 사복 차림의 한 사람이 방 안에 들어온 불청객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들 뭡니까? 누가 들여보내 줬어요?"

이번에는 퍼킨스가 목에 달린 명찰을 보여주었다.

"사건 인수하러 왔죠. 낯이 익은데, 혹시 DPD경관입니까?"

가늘게 뜬 눈으로 퍼킨스의 얼굴과 명찰을 번갈아 보던 남자가 한쪽 입술을 끌어 올렸다.

"아아. 그때 그 FBI 양반이구만."

남자는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팍팍 내며 대답했다.

"개빈 리드. 형사입니다. 여기는 크리스 밀러 경관."

옆에 선 다른 경찰관이 고개를 까닥였고 노먼은 그와 가볍게 통성명을 한 뒤 주위를 둘러봤다. 응접실 안에는 한 명이 더 있었다. 창가에 선 채, 그들을 등진 한 남자를 바라 본 노먼이 물었다.

"저분은요?"

개빈이 고개를 돌려 노먼이 가리키는 곳을 보곤 코웃음을 쳤다.

"저건 무시해도 됩니다."

그자는 방안에 누가 들어왔는지 신경도 안 쓰고 창가만 유심히 살피는 중이었다. 노먼이 목을 쭉 빼며 개빈의 어깨너머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죄송하지만, 여긴 FBI가 인계받아서요. 남은 조사는 저희가 이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노먼의 말에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노먼은 그의 관자놀이에서 빛나는 푸른색의 빛 고리를 발견했다. 안드로이드의 밤색 눈동자가 정면을 향하고, 그와 동시에, 활짝 열린 창을 타고 넘어온 서늘한 밤공기가 응접실 안쪽으로 들이쳤다.

라파예트 공원에 만개한 금목서 향이 현장에 짙게 깔린 죽음의 기운을 흐트러뜨렸다. 안드로이드의 이마를 살짝 덮은 어두운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살랑이고 노먼의 옷자락이 뒤로 나부꼈다. 노먼은 앞에 선 자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주름 하나 없이 단정하게 차려입은 회색 유니폼, 정돈된 넥타이와 깔끔하게 넘긴 머리, 각진 선의 얼굴, 얇은 입술과 곧게 뻗은 눈썹.

그 아래 자리한 두 눈은, 차갑도록 무표정했다.

미술관에 전시된 조각상처럼 반듯한 얼굴이 맑은 우물처럼 투명하고도 깊은 은회색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했고, 안드로이드와 인간은 조용히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노먼은 남자가 말하기만을 기다렸지만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노먼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킨 채 서 있었다. 무감한 안드로이드의 얼굴을 보며 노먼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아직 각성하지 못한 몇 안 되는 개체인가?

유달리 조용하던 퍼킨스가 말문을 열었다. 

"네놈은⋯⋯."

그러나 금세 뒷말은 흐려지고 퍼킨스는 그 짤막한 한마디만 내뱉고 입을 다물었다. 안드로이드가 눈을 굴려 퍼킨스를 바라보더니 단조로운 목소리로 응답했다.

"안녕하세요. 요원님."

이번엔 노먼이 의아한 눈으로 퍼킨스를 바라봤다.

"아는 사이야?"

"그래."

노먼은 제대로 된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바라봤으나 퍼킨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개빈이 소리쳤다.

"야, 뭐하고 서 있어! 이분들이 사건 넘겨받았다잖아. 우린 이만 철수할 거야."

"아직 조사가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노먼은 다시금 안드로이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조사를 하고 있었죠?"

"침입자가 들어온 위치와 방향, 남은 흔적을 보고 범인을 특정하는 중이었습니다."

"나온 게 있나요?"

"아무것도요. 머리카락도, 지문도. 그저 이 집 정원과 똑같은 성분의 흙이 묻은 발자국과 창틀에 묻은 손자국뿐입니다."

가만히 듣고있던 퍼킨스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손자국? 지문이 없다면서. 장갑을 끼고 있던 건가?"

"가능성이 있지만 확률은 낮습니다. 창틀 나무의 거칠기를 보았을 때 장갑의 섬유 조각이 남았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어요. 아마 맨 손이었을 겁니다."

"죽은 안드로이드를 훔쳐 간 자가 같은 안드로이드일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갈색 눈이 다시금 노먼을 바라봤다. 완벽하지 않으며 그래서 조금 더 친숙한, 약간 쉰 듯한 음성이 기계에서 흘러나왔다.

"네."

그 대답에 퍼킨스가 어이없단 듯 웃었다.

"허, 참. 본부가 우리에게 정확히 맞는 사건을 배정해 줬네."

안드로이드가 재차 말했다.

"의원 사망 사건은 FBI에 인계되었으니 따로 조사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가택 침입 및 절도 사건은 여전히 디트로이트 경찰서의 소관입니다. 두 건이 동일범의 소행이라고 밝혀지지 않은 이상, 이 부분은 DPD 관할 사건으로 처리되어 저희가 수사를 진행할 영역입니다."

노먼은 멍한 표정으로 안드로이드를 바라봤다. 말이 안 되는 주장은 아니었다. 사망 건과 침입 건은 전혀 다른 별개의 사건일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했으나, 그럴 확률은 다분히 낮았다. 설령 저 자의 말이 맞다 해도 보통은 담당 구역 내에서 추가로 발생한 사건 역시 담당하던 조사관의 책임이 되는 게 일반적인 통념이었다. 

이는 FBI나 경찰 할 것 없이 서로 존중하는 부분이었으며 수사기관들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노먼은 무어라 대꾸할지 몰라 눈만 껌뻑였다. 혹시 DPD에서는 그들만의 규칙이 따로 존재하는 건가? 그러나 그건 아니었는지 개빈도 헛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야, 이 답답한 깡통아. 이건 이미 우리 손을 떠났어. 의원이고 침입자고, 전부 저 양반들 소관이 되었다니까? 비켜주면 저들이 어련히 알아서 할 텐데—"

"파울러 서장의 승인이 났나요?"

"뭐?"

"침입 사건까지 모두 FBI에 인계하겠다는 정식 승인이 떨어지면 그때 마무리 짓겠습니다. 그전까진 저는 여기서 계속 조사를 이어 나가야 합니다."

퍼킨스가 황당한 표정으로 중얼댔다. 

"⋯여전히 골때리는 기계구만."

신경질적으로 뒤통수를 긁던 개빈이 한숨을 푹 쉬며 몸을 돌렸다.

"미안하게 됐수다. 저 자식은 원래부터 인간 말을 안 들었어요. 뭐, 그렇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니 저희가 침입 사건을 따로 조사하죠. 이 사건마저 가져가고 싶다면 정식으로 요청 문건 작성해서 우리 쪽에 보내십쇼."

“이봐요—”

개빈은 반박하는 퍼킨스를 무시하며 크리스에게 지시했다.

“거기 장비 치우고 공간 좀 만들어드려. 그쪽은 이 양반들이 조사하신다니까.”

오물로 범벅된 장소 근처에서 기기들이 몇 개 치워졌다. 퍼킨스는 개빈을 쏘아보고는 노먼을 향해 낮게 속삭였다.

"이 자식들은 도무지 변하질 않는군. 또 쓰잘데기 없는 데서 이상한 견제질이나 해대고 말이야.”

말을 얹진 않았으나 노먼 역시 퍼킨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래서 경찰과 일하는 게 피곤했다. 사건에 집중하기보다 FBI를 방해하는 데 더욱더 공을 들이는 행태를 도무지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인간은 그렇다 쳐도 안드로이드까지 저런 태도라니⋯. 어찌 보면 저 단체는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인간, 기계 할 것 없이 인성이 글러 먹게 되는 걸지도 몰랐다.

그래. 저들은 저들 일이나 하라지. 경찰로부터 몸을 돌린 노먼은 구석으로 걸어가 바닥에 쏟아진 푸른 혈액에 시선을 집중했다. 인간과 비슷한 형상의 물체가 누워있던 것이 분명한 그 흔적은 대리석 바닥을 지저분하게 물들이며 흰 벽에도 꽤 많은 자국을 남겼다.

노먼은 좀 더 자세히 관찰했다. 벽면에 묻은 혈흔의 방향과 모양을 봐서는 둔탁한 둔기로 여러 대 내려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미 증발한 티리움 자국은 너무 흐릿해서 육안으로 분별해 내기가 어려웠다.

그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고는 물건 하나를 꺼내들었다. 몹시도 평범한 형태의 검은 선글라스가 그의 손바닥 위에 놓여있었다. 약칭 ARI. 모든 FBI 수사관에게 지급된, 증강 현실 수사보조 도구였다.

노먼이 안경다리를 펼치고 얼굴에 얹자마자 작은 렌즈 속 화면이 켜지며 내재된 기능이 시야 위로 나타났다. 방안의 채도가 확 낮아지고, 이곳에서 유달리 독특한 물체나 이질적인 정보만이 주홍색 인터페이스로 표시되었다. 노먼이 시선을 돌리자 벽면에 남은 파란 피가 흑백의 세상에서 또렷한 색채를 가지고 선명하게 망막에 맺혔다.

'티리움. 안드로이드의 생체부품을 가동하는 연료.'

노먼이 시선을 돌려 바닥을 내려다봤다. 말라붙은 혈액 주변으로 발자국이 보였다.

'길이 310mm. @—양, -분석 결과 SQ8—델.'

'손바- 자국의 크기와 형—#'

뭐지? 노먼은 안경을 벗었다. 렌즈의 안쪽은 여전히 푸른 빛으로 깜빡이며 제대로 작동하는 상태였다. 고개를 갸웃한 노먼이 다시금 ARI를 착용했다.

'손바닥 자국의 크기와 형태 분석. KR200 모델.'

일시적인 오류였던 모양인지, 이번에는 정보가 제대로 떠올랐다. 수사관이 주로 근무하는 환경인 거칠고도 험악한 여건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ARI는 내구성이 무척 뛰어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고장 난 적이 없었다. 반대로 인간이 고장 난 적은 있어도. 그러나 디트로이트에 전근 온 후부턴, 가끔가다 이렇게 말썽을 부렸다. 

수사에 큰 지장이 없었기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계속 이런식이면 조만간 연구소로 보내 수리를 맡겨야 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며, 노먼은 다음 단서로 시선을 돌렸다.

‘KR200 모델. 출시가 5,000달러. 페이지 클라인의 가정부 안드로이드.’

노먼은 주머니에서 ARI 조작용 센서 장갑도 꺼내들고는 오른손에 착용했다. 정보를 누르자 관련된 사건 파일이 공중에 떠올랐다. 발견 당시 찍힌 현장 사진과 함께, 피를 흘리며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은 안드로이드의 모습이 텅 빈 바닥 위에 투영됐다.

'후두부 손상. 좌측 팔 파손. 좌측 어깨 부품 분리, 우측 정강이 분해. 생체부품의 치명적인 손상.'

노먼은 다시금 핏자국을 살폈다. 아까 그가 관찰하려다 만 발자국이 보였다. 그는 손을 들어 그곳에 뜬 정보를 눌렀다. 표식이 지직거리며 흔들렸다.

'발자국. 길이 310mm. 모양과 걸음 ^$#-과 S-@800$델#—'

‘데이터 충돌 감지!‘

눈앞이 번쩍이고 머리가 쿵, 울렸다. 노먼은 비틀대며 이마를 짚었다. 콧등이 시큰거리고, 축축한 액체가 인중을 타고 내려와 입술로 흘러들었다. 그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시끄러운 경보음과도 같은 소리가 두개골을 울렸고 목구멍에서 울컥하는 감각이 솟구쳤다. 

노먼은 옆에 있던 퍼킨스를 밀치고 재빨리 현장을 뛰쳐나가 화장실로 달려갔다. 급한 손길로 변기 뚜껑을 젖힌 노먼이 그 안에 얼굴을 처박고 속을 게워 냈다.

"무슨 일이야?"

허겁지겁 따라 들어온 퍼킨스가 물었지만, 노먼은 대꾸할 정신도 없었다. 먹었던 저녁을 모조리 토해내고 나서야 겨우 변기를 붙잡고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퍼킨스가 그의 등을 두들겨주며 낮게 속삭였다.

"현장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닌데 초짜처럼 왜 이래? 경찰 놈들 앞에서 쪽팔리게 이럴 거야?"

노먼은 눈을 꾹 내리감았다. 눈구멍에 안구 대신 만화경이 들어간 것처럼 세상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ARI를 벗어 어깨너머로 건네주었다. 여전히 앞이 흐렸지만, 안경을 벗으니 그런대로 또렷하게 사물이 망막에 들어왔다. 힘없이 물을 내린 노먼이 일어나 세면대 앞에 서서 수도를 틀었다.

깨끗이 입을 헹구고 나서도 여전히 정신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고 어지럼증이 지속되었다. 노먼은 머리가 시원해질 때까지 찬물로 연거푸 세수했다. 수도를 잠그고 뚝뚝 떨어지는 물을 재킷 소매에 대강 문질러 닦고 나니, 그래도 아까보단 다소 정신이 맑아지는 듯했다.

"설마 이것 때문이야?"

퍼킨스는 안경을 들고 괴상한 얼굴로 노먼을 바라보고 있었다. ARI 부작용? 노먼은 잠시 생각하다가 얼굴을 흔들었다. 그것도 못잖게 머리를 헤집어 놓긴 했으나 이렇게 메스껍고 뇌졸중 올 것 같은 느낌은 절대로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누가 쓰라 마라 할 것도 없이 노먼 스스로가 진작에 갖다 버렸을 것이다. 그는 퍼킨스의 손에서 안경을 채가며 화장실을 나섰다. 퍼킨스가 뒤따라 나오며 끈질기게 물었다. 

"ARI 때문이 아니라고? 근데 왜 그래?"

"몰라. 아까 먹은 햄버거가 상한 모양이지."

"햄버거가 상했는데 코피는 왜 흘려?"

노먼이 손을 들어 코 아래를 훑었다. 피는 이미 멎었고 물에 씻겨내려 갔으나 미처 닦이지 못한 선분홍색 혈액이 손가락에 조금 묻어났다.

"그건⋯. 피곤해서 그래."

"급성 식중독이랑 코피가 동시에 터졌다고? 너 지금 네가 무슨 소릴 하는지 듣고 있긴 한 거냐?"

또다시 잔소리가 시작됐다. 노먼은 파트너의 재잘거림을 반쯤은 흘려들으며 현장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여전히 경관 둘과 안드로이드가 있었으나 퍼킨스의 걱정과는 달리 그들은 노먼이 나간 것도 깨닫지 못한 듯했다.

개빈이 통화를 하며 속사포로 떠들어댔다.

"아니, 그러니까 서장님. 제가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가만히 있는데 지멋대로 대가리가 뻘게지더니 쓰러졌다고요!"

상대 쪽에서도 무어라 고함이 들려왔다. 개빈이 휴대폰을 귀에서 떼며 크리스에게 넘겨주었다.

"네가 말해 봐. 도통 알아먹질 않으시네."

"서장님, 밀러입니다. 개빈 형사님 말이 맞아요⋯. 예, 알겠습니다. 네."

그가 이번에는 안드로이드에게 전화를 넘겨주었고 안드로이드는 수화기에 대고 대신 설명했다.

"죄송합니다. 파울러 서장님. 잠깐 전송 시스템에 오류가 생긴 것 같습니다. 이번 일은 개빈 형사님의 폭행으로 벌어진 일이 아님을 확언 드립니다. 네. 이번에는요."

안드로이드가 통화를 끊자, 개빈이 눈알을 사납게 굴렸다.

"서장님은 왜 내 말은 안 들으면서 깡통 말만 듣는 거야?"

크리스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으나 하지 못했다. 안드로이드는 고개를 돌려 문가에 선 FBI 요원들을 바라봤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아뇨. 뭘요⋯." 

얼결에 대답한 노먼은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했으나, 동시에 자신의 추태를 경찰이 보지 못했음에 안도했다.

그는 현장을 둘러봤다. 피해자의 혈흔과 사망자가 남긴 오물이 가득한 방 안에 서 있자니 재차 속이 울렁거려왔다. 도저히 지금 몸 상태로 수사를 이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노먼은 결국 ARI를 품에 꽂아 넣으며 퍼킨스에게 제안했다.

"벌써 11시가 넘었어. 자세한 조사는 내일 하자."

노먼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퍼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지."

"저희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현장 배치 요원도 아마 지금쯤 아래에 도착했을 겁니다. 혹시라도 추가로 알아낸 사항이 있다면 그들에게 전달해 주세요."

노먼의 부탁에 개빈은 코웃음을 친 반면, 크리스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네. 들어가세요."

안드로이드 역시 개빈과 같았다. 코웃음은 치지 않았으나 요원이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나갈 때조차 신경을 끄고 제 할 일만 했다. 이에 퍼킨스가 문을 나서며 중얼댔다.

"하여간 싸가지들."

노먼이 보기엔 경찰의 행동이나 평상시의 퍼킨스나 아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그는 그저 조용히 웃으며 계단을 내려가 문밖을 나섰다. 차가운 밤공기가 기도를 타고 폐로 들어오니 한결 기분이 나아지는 듯했다. 노먼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주차된 차를 향해 몸을 돌리려 했으나, 퍼킨스가 어깨를 강하게 잡아챘다.

노먼이 돌아보자 그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상태로 무슨 운전을 한다는 거야? 너 혼자 죽는 거면 몰라도, 길 가던 무고한 시민까지 죽이고 싶지 않다면 내 차 타고 가."

퍼킨스의 협박 어린 충고에 노먼이 주머니에 꽂은 손을 가만히 쥐었다. 아까부터 줄곧 노먼의 두 손은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중이었다. 차에서 한숨 자고 일어나 상태가 괜찮아지면 출발하려고 했으나 퍼킨스가 알아챈 이상 더는 고집을 부릴 수도 없었다.

"그래. 알았어."

어쩔 수 없다는 듯 노먼이 수긍하자 퍼킨스는 그를 흘겨보고선 주차된 차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차에 내장된 스크린을 터치한 그가 맞은 편에 탑승한 노먼을 향해 물었다.

"집이 어디야?"

"그리스 월드 1117번가. 파트너가 온 지 반년이 지났는데, 어디 사는지 정돈 알아두지 그래?"

퍼킨스는 노먼의 불평 섞인 핀잔을 무시하고 목적지를 입력했다. 둘이 탄 차는 라파예트 가를 빠르게 벗어나 노먼의 아파트로 향했다.

 


 

노먼은 FBI 디트로이트 건물과 고작 몇 블록 떨어진 지점에 살고 있었다. 일전에 그가 코앞에 방을 구했다는 말은 하긴 했으나 당시 퍼킨스는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기에 넘겨들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만약 노먼이 현장직이 아니었다면 직장에 차를 가지고 다닐 필요조차 없는 황금 같은 위치가 바로 그의 집이었다. 퍼킨스는 조금 부럽다는 투로 중얼댔다.

"여기야? 네가 타는 고물 자동차와는 다르게 집은 참 좋네."

대답이 없자 퍼킨스가 고개를 돌렸다. 고작 5분 남짓한 거리임에도 파트너는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쿨쿨 자고 있었다. 퍼킨스가 눈썹을 찌푸리며 노먼을 흔들어 깨웠다.

"노먼! 일어나. 다 왔어."

눈꺼풀을 들어 올린 노먼이 새빨개진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창밖을 내다봤다. 한차례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손잡이를 당기며 무성의하게 인사했다.

"고맙다⋯. 잘 가고. 내일 봐."

땅을 딛고 걸어가는 휘적거리는 모양새가, 금방이라도 고꾸라져 뒤통수가 깨져버릴 것처럼 위태위태해 보였다. 노먼이 결근하면 수사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질 터였다. 다리를 질질 끌며 아파트로 향하는 노먼의 뒷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퍼킨스는 결국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려야했다.

"하, 진짜⋯⋯."

저 자식이 제 집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을 확인하지 않고서야 도저히 안심할 수가 없었다. 벌써 몇 년째 같이 일하는 이놈의 파트너는 정말이지 더럽게 손이 많이 갔다. 신입일 때는 애송이 짓 뒷바라지 해주느라 바빴다지만, 어느 정도 숙련된 요원으로 성장하고 나서부턴 그래도 조금은 편해진 줄 알았다. 하지만 디트로이트로 전근해 온 노먼은 다시금 퍼킨스의 속을 벅벅 긁으며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비틀대며 걸어가던 인간의 팔뚝을 부축한 퍼킨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건 전처한테도 안 해줬는데."

노먼이 믿을 수 없단 눈으로 바라봤다.

"진심이야? 아내를 집에 데려다준 적이 없다고?"

"굳이 안 그래도 알아서 잘 들어갔으니까."

"⋯너의 무심함을 흉봐야 할지, 아니면 친구로서 진지하게 조언을 해줘야 할지 고민되네."

"닥쳐. 지금 네놈한테 친절을 베풀어준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나 해."

"그래. 매우 감사해."

퍼킨스는 이를 갈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노먼이 버튼을 누르자 문이 닫히고 승강기는 귀가 먹먹할 정도의 속도로 최고층을 향해 올라갔다.

이윽고 띵, 소리와 함께 내린 둘은 걸음을 옮겨 복도 끝에 놓인 문으로 향했다. 노먼이 도어락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니 잠금쇠가 풀렸다. 과하도록 육중한 현관문의 무게에, 퍼킨스가 어깨에 힘을 주어 열어젖힘과 동시에 복도에 불이 켜졌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노먼은 바로 욕실로 향했다. 세면대에 물을 받는 소리가 넓은 집을 울렸다.

퍼킨스가 눈을 들어 어슴푸레한 집 안을 둘러보았다. 욕실 내 언뜻 본 샤워부스와 마찬가지로, 망입유리로 된 가벽이 복도와 부엌 공간을 분할하고 있었다. 퍼킨스는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방문 하나를 열었다. 묵직한 무게의 문이 소리 없이 밀려나고 불 꺼진 어두운 침실이 드러났다. 퍼킨스가 벽을 두어 번 두드렸지만 반사되는 울림이 전혀 없었다. 매우 촘촘한 밀도와 경도로 이루어진 내장재 같았다.

“이봐, 리처드. 남의 집을 그렇게 샅샅이 구경하는 건 예의가 아니야.”

욕실에서 나온 노먼이 그의 뒤를 지나쳐 거실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세수하고 나온 듯 앞머리가 축축했고 얼굴은 좀 더 멀끔해졌다. 노먼이 끙하는 신음을 흘리며 머리에 손을 올렸다.

퍼킨스가 거실을 향해 발을 돌렸다. 노란 간접조명으로 어둑하게 밝혀진 거실의 통유리창 너머로, 디트로이트의 야경이 훤히 드러났다. 자정이 넘었음에도 이 도시는 아침이 올 때까지 그 빛을 끊임없이 발하고 있을 것이었다.

“전망이 아주 멋진데.”

창가로 다가간 퍼킨스가 밖을 내다봤다. 두꺼운 유리 뒤로 빌딩 숲이 미세하게 왜곡되어 보였다. 그의 초점은 이제 건물이 아닌 유리에 맞춰졌다. 시선을 기울이자 굴절된 각도로 빛이 꺾여 들어오는, 여러 겹으로 접합된 유리 층을 발견했다. 그는 이런 류의 재질을 매우 잘 알았다.

퍼킨스가 고개를 돌렸다.

“너, 이 집 뭐야?”

쿠션에 머리를 기댄 노먼이 다리를 반대편 팔걸이에 얹으며 길게 드러누웠다.

“뭐가.”

“방탄유리에 강화 콘크리트, 특수 재질로 된 문까지. 집이 아니라 거의 방공호인데?”

퍼킨스를 올려다본 노먼이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뭐일 것 같아?”

미간을 찌푸리며 한참을 둘러보던 퍼킨스가 불현듯 깨달은 얼굴로 물었다.

“설마. 안전 가옥이냐?”

노먼은 아무런 대답도 안 했으나 씩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며 퍼킨스는 기막혀했다.

“위치가 드러난 안가에서 사는 거야?”

“괜찮아. 관련 사건이 종결된 지도, 노출된 지도 좀 지났어. 여긴 그냥 다른 곳보다 좀 더 튼튼하고 근사한 집일 뿐이야.”

“어떻게 구했지?”

“사내 게시판에 가끔 공고로 올라오던데? 일반인에게 팔긴 위험하고, 그렇다고 아까운 집을 썩힐 수도 없으니. 덕분에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멋진 곳을 얻었지. 임직원 할인이랄까? 디트로이트는 집값이 너무 비싸.”

퍼킨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이 부유한 거리에서 이토록 넓고 쾌적한 집을 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암만 그래도 범죄 조직에 위치가 알려진 가옥을 쓴다는 건 정상적인 신경을 가진 사람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친놈. 안전 가옥을 자취방으로 쓰는 인간은 너밖에 없을 거다.”

“뭐 어때. 이름 그대로 안전하잖아.”

노먼이 늘어지게 하품하며 입을 쩍 벌렸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리처드. 내일 현장으로 바로 가면 되지?”

“그래. 지각하지 말고 9시까지 와.”

“응. 알았어⋯.”

노먼은 피곤함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이만 파트너를 쉬게 해줄 때가 되었다고 느낀 퍼킨스는 거실 불을 끄고 현관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밖으로 나온 그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짙은 먹구름에 달빛이 가려져 있었다. 내일은 비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퍼킨스는 자신의 차에 탑승했다.

전기 모터가 울리는 진동 소리와 함께 바퀴가 서서히 움직였다. 검은 세단 한 대는 그렇게, 가로등이 환히 밝혀진 그리스 월드 거리를 부드럽게 굴러가다가 서서히 어둠속으로 사라졌다.